박씨는 사태를 대강 짐작했다.
‘결국 저 녀석이 나를 예까지 끌어냈구나. 참으로 몹쓸 녀석이네그려.’
그때 도척이 원님 앞에서 말했다.
“저는 비록 가난하고 게으르며 구걸을 해서 먹을지언정 양심 하나는 바르게 갖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알뜰히 돈을 모아 만 냥을 항아리 속에 넣어 두었습니다. 한데 이 사실을 안 우리 동네의 의원 박씨 영감이 제가 아픈 틈을 타 침과 뜸을 놓고 약을 주면서 온갖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제 돈 만냥을 훔쳤습니다.”
도척은 약 봉지를 증거물로 제시했다. 원님은 박씨 영감을 불러 물었다.
“의원 박씨는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가?”
의원 박씨는 얼울하다는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소인은 평생 동안을 오직 의술을 인술로 알고 실천해 왔습니다. 저는 사람을 돕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습니다. 제가 어떻게 남의 돈을 훔치겠습니까? 정말 억울하옵니다.”
의원의 말을 듣고 원님이 말했다.
“그러면 이 약 봉지는 무엇인가? 그대가 도척이를 치료해 준 것은 사실이렷다.”
“그렇습니다. 제가 도척이의 죽을 목숨을 살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은혜를 배반으로 갚을 수 있습니까?”
“어쨌든 증거는 성립이 된다. 그대가 도척이의 집에 갔던 것을 부인하지 않고, 또 약봉지가 그 증거물이 되는 이상 나는 고을 원의 직권으로서 그대에게 만 냥을 고스란히 배상할 것을 선고한다.”
의원 박씨는 아무리 배심, 삼심을 청구했지만 결국 패소하고 말았고,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었다. 반면 젊은이는 부자가 되었다. 만 냥은 적은 게 아니었다. 도척은 좋은 집을 사서 거들먹거리며 살았다. 어려운 이웃에게 선심을 쓰는 체 돈을 빌려 주기도 했다. 그러나 만일 제 날짜에 갚지 못하면 어김없이 가산을 몰수하는 등 그 횡포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도척은 좋은 집에서 잘먹고 잘입고 떵떵거리며 살게 되자, 장가가 가고 싶었다. 그러나 성질이 고약하고 게으르기로 소문난 집에 선뜻 딸 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중 같은 마을 이생원의 딸이 곱게 자랐다는 얘기를 듣고 도척은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아내로 삼을 수 있을까? 고리대금으로 낚아채 버릴까. 히히, 그러면 꼼짝없이 당하겠지?’
도척은 득달같이 이생원 집으로 달려갔다.
“이리 오너라.”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이생원이 문을 열고 나와 보니, 도척이었다. 이생원이 말했다.
“어떻게 오셨는가?”
“사람을 밖에 세워 놓고 얘기할 참입니까? 어험.”
“안으로 드시게나.”
도척이 말했다.
“제가 가진 것은 비록 많습니다만, 아직까지 좋은 일 한 번 못 해 보고 살았습니다. 앞으로는 남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허!”
“제가 알기로는 생원댁 살림이 요즈음 매우 곤궁하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빌려 드릴까 하는데 어떠신지요? 아, 물론 당장 갚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을에 농사를 거두어 천천히 갚으시면 됩니다. 부담은 안 가지셔도 됩니다.”
이생원은 도척의 말을 들으며 곰곰히 생각했다. 이는 무슨 꿍꿍이속이 있을 것이라 여겼다. 생전 찾아오지도 않던 사람이 불쑥 찾아와서 돈을 빌려 주겠다니 그도 그럴 만했다. 더욱이 도척은 악락하기로 소문난 자가 아닌가. 이생원의 표정을 읽은 젊은이가 안심을 시키듯 말했다.
“제가 그냥 드린다면 생원 어른께서 받지 않으실 것이고, 그러니 이자는 그만 두시고 가을 수확이 끝난 뒤에 상환만 하십시오.”
처음에는 사양하던 이생원도 워낙 살림이 곤궁하다 보니 할 수 없었다. 그는 도척에게서 쌀 한 섬을 가져 왔다. 그러나 그해 농사는 흉년이었다. 삼복 때 이상저온현상으로 초가을 날씨같았고 게다가 걸핏하면 장마가 지곤 했다. 일조량이 부족한 농작물은 자연 거둘 것이 별로 없게 되었다. 이생원은 젊은이를 불러 사정을 얘기하며 다음해로 연기해 줄 것을 부탁했다.
“정 그러시다면 할 수 없군요. 대신 제가 빚 상환을 하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생원님의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이생원은 기가 막혔다. 도척은 계획대로 생떼를 썼다. 남에게 빚을 지고 있는 입장이라 뭐라고 할 말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딸을 내놓으라니 이건 참으로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밖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척이 문을 열고 내다보니 옛날 그 노스님이었다. 도척은 이생원과 얘기하던 것을 중단하고 한걸음에 뛰어나갔다.
“이 놈의 땡초, 잘 만났다. 지난 번에도 나를 골탕먹이더니, 이번에는 또 무슨 꿍꿍이속으로 찾아왔느냐, 엉.”
노스님이 합장을 하며 말했다.
“소승, 몹시 시장하여 공양 한 끼를 부탁할까 하네. 전에는 젊은이가 가난해서 베풀 게 없었겠지만, 이젠 이 고을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었으니 이 늙은 산승에게도 밥 한 술 나누어주게.”
도척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고함을 쳤다.
“웃기고 있네. 당장 꺼지지 못해.”
도척은 성큼성큼 광으로 달려가더니 몽둥이 하나를 집어들고 나왔다. 그는 몽둥이를 높이 쳐들어 노스님을 내리쳤다. 노스님은 피할 생각도 않고 태연하게 염불만 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청년의 높이 쳐든 팔이 그대로 정지되더니 서서히 굳으면서 바위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를 처음부터 지켜 본 이생원은 너무나도 희한한 일에 자신도 모르게 노스님 앞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했다. 스님이 도척을 향해 말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않으면 개, 돼지나 다름이 없는 법이다. 게으르고도 악독한 마음으로 남을 괴롭혀 온 너는 반드시 죄값을 치러야 한다. 그러니,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착한 마음으로 살아갈 때까지 너는 바위로 서 있거라.”
스님을 그 말을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도척바위’라 부르며 삶의 지침으로 삼았다고 한다.
-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