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상하군. 왜 절을 지을 때 함께 세우지 않고 이제와서 탑을 세운담. 그리고 구층탑을 세우는 이유가 뭘까?’
그는 혼자 경내를 거닐며 계속 중얼거렸다. 그날 밤 아비지는 백제가 멸망하는 꿈을 꾸었다.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치는 꿈에서 깨어나 혼자 생각에 잠겼다.
‘예술이고 뭐고 안 돼. 고국으로 돌아가야해. 이러다가 영영 처자식과 이별하고 말지도 모른단 말야.’
그는 신라를 빠져 나갈 결심을 했다. 짐을 챙긴 후 밤이 되길 기다렸다.
달은 밝았다. 몰래 아간 용춘의 침소를 빠져 나온 아비지는 황룡사에 이르렀다. 그는 부처님 앞에서 자신의 꿈이 단지 꿈이기만을 기원했다. 백제의 멸망은 안 될 일이기에. 법당에서 나와 다시 한번 탑주를 바라보는 아비지의 마음은 감회가 새로워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라 없는 백성이 되기 전에 백제로 돌아가야 하리. 아, 나의 꿈이 다만 꿈으로 끝났으면.’
마음을 다지고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었다. 달이 밝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사나운 바람이 무서운 속도로 불어와서는 탑주를 중심으로 회오리를 치며 솟아올랐다. 먹장구름이 달빛을 가렸다. 아비지는 놀라 법당으로 뛰어들었다.
법당에 들어서면서 밖을 내다보는 순간 그는 또 한 번 놀랐다. 미친 듯한 바람도 먹장구름도 모두 걷히고 천둥 번개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다만 밝은 달빛 아래 탑주만이 우뚝 서 있었다. 참으로 일순간의 일이었다.
그는 밖으로 나오려다 흠칫 놀라 안으로 뒷걸음질쳤다. 광풍과 먹구름, 천둥과 번개가 멈춘 마당 가운데에 낯모를 노스님 한 분과 키가 아홉 자나 되어 보이는 장수 한 사람이 나타나 자기가 그 동안 애써 세웠던 탑주와 똑같은 탑주를 세우는 것이었다. 실로 찰나의 일이었다. 아비지가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두 사람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아비지는 생각했다.
‘이것은 필시 부처님께서 나에게 탑불사를 계속하라는 계시일 것이다.’
아비지는 생각을 고쳐 다시 탑불사에 전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비지의 가슴에 또 한 번 파문이 일었다.
‘이 탑이 완성되면 아홉 나라에서 신라에 조공을 바친다고…’
그는 더 이상 탑을 조성할 수 없다고 마음먹고 짐짓 생병을 앓기 시작했다.
아비지에게 사모의 정을 품은 채 늘 가슴만 조이던 낭자가 있었다. 그녀는 아간 용춘의 외동딸이었다. 그녀는 문병과 간병을 핑계삼아 방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지극정성으로 아비지를 보살폈다. 하루는 아비지가 물었다.
“아미 낭자, 그대는 구층탑을 세우려는 의도를 알고 있지요?”
“소녀는 모르는 일이옵니다.”
아비지는 아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낭자도 틀림없는 신라의 여인이군.”
아미 낭자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외부인사, 특히 아비지에게는 극비에 해당하는 일이었으므로 발설할 수가 없었다. 사모하는 사람 앞에서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자신을 생각하며 마음이 아팠다. 아비지가 불쌍하고 측은하게 보였다.
며칠간 병석에 누워 있던 아비지는 모든 것을 단념키로 하고, 병석에서 일어나 탑불사에 다시 전념했다. 마침내 총 높이 2백 25척의 거대하고 웅장한 탑이 완성되었다. 그는 탑을 바라보다가 문뜩 무슨 생각에선지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아비지의 눈에서는 주먹 같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도도히 흐르는 강가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춘 그는 백제의 사비성이 있는 쪽을 향해 큰절을 네 번 올렸다. 그리고 반짝이는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풍덩.”
“풍덩.”
아비지가 물 속에 뛰어든 것이다. 뒤 따라 물 속에 뛰어든 사람은 아비지를 사모하던 아미 낭자였다. 그녀는 함께 죽음으로써 국경을 뛰어넘는 사랑을 완성하려 했던 것이다. 한편 구층탑을 세운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고 그 탑은 신라의 3대 보물 중 하나가 되었다.
이 탑이 있던 경주 황룡사지 일대를 구황동이라 부른다. 일설에는 황룡사의 구층탑을 줄여서 구황동이라고도 한다. 또 황룡사, 분황사, 황복사 등 ‘황’ 자가 들어가는 절이 아홉 개가 있었다고 해서 구황동이라고도 하고, 또는 진흥왕 때 황룡사터에 신궁을 지으려고 하는데 아홉 마리의 황룡이 나타나 승천하므로 궁궐 대신 절을 세우고 구황동이라 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황룡사는 빈터만 남아 있고 구층탑도 자취를 감추어 버렸지만, 경주시 구황동에는 아비지의 예술혼이 아직도 살아 남아 있는 것이다.
-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