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의 발길은 가벼웠다. 그는 삼각산 인수봉에 올랐다. 거기는 한 노승이 5백나한에게 예배하는 형국을 띤 자리였다.
‘그래, 이 인수봉을 안으로 넣고 성을 쌓으면 불교도 오랫동안 민중들 속에서 제 구실을 다할 것이로다.’
무학은 그 다음 인왕산에 올랐다. 그 산에 올라 삼각산 자락을 내려다보니, 참으로 명당 중에 명당은 자신이 처음 당도했던 그곳이었다. 그는 남산으로 올랐다. 북쪽으로는 아늑한 지세가 자리하고 있었고 남쪽으로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데, 한강이남으로 넓은 들판이 한눈에 보아도 도읍지의 백성들을 먹여 살리고도 남을 듯 싶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자신이 지나온 청게산이 아련히 보였고, 과천 쪽으로는 관악산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관악산을 보면서 일말의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관악산은 화산으로서 그 산을 잘 달래지 않으면 아무리 남산이 중간에서 기후 조절을 잘 해 준다 하더라도 궁궐에 불이 자주 일어날 형국이었다. 그러나 방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미리 예방을 하면 괜찮을 듯했다. 무학은 한양을 도읍지로 선택한 데 대한 무한한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송도로 향했다.
‘어서 가서 태조에게 이 소식을 알려 드려야 한다.’
그의 걸음은 유달리 가벼웠고 또 빨랐다. 어느새 서대문자리를 지나 고갯마루에 올라섰다. 그는 잠시 지나온 곳을 되돌아 볼 겸 고개에 바랑을 벗어 놓고 쉬다가 또 하나의 명당을 발견했다.
‘여기다 절을 지으면 불교가 오랫동안 지속되리라.’
이 재가 무학대사가 사찰 명당자리로 잡았던 곳이라 하여 무학재로 불리다가 무악재로 변형된 곳이다. 송도에 도착한 무학대사는 태조에게 그 동안 보고 듣고 느낀 점들을 상세히 보고했다. 태조도 크게 기뻐하여 천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궁궐을 짓고 도성을 쌓으면서 새로운 역사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도성을 어디에다 쌓느냐는 것이었다. 무학대사는 인수봉 안으로 쌓아야 한다고 했고 조정의 개국공신들은 인수봉 안으로 쌓아야 한다고 했다.
수에 밀린 무학대사는 홀로 탄식하기를 마지 않았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무학대사가 불교인이었고 또 인수봉 밖으로 쌓아야 천년대계를 이어 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인수봉 안으로 도성을 쌓을 경우 불교의 억압이 심해지고 천년 도읍지가 5백년 밖에 갈수 없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개국공신들은 모두가 유생들이었다. 그들은 내심으로는 한양의 지기가 천년에서 5백 년으로 줄어드는게 아쉬웠지만 유교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인수봉 안으로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교와 유교의 세 다툼을 드러내놓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유생들이나 무학대사나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논쟁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마침내는 무학대사가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반드시 수적으로 미약해서가 아니라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즉, 입장이 난처해진 태조는 천제를 지내어 결정키로 했다. 날을 잡아 제사를 지낸 다음날이었다.
이른 봄이라 밤새 눈이 내렸건만 모두 다 녹아 버리고 축성의 시비가 되가 있는 인수봉 부근에만 선을 그어 놓은 듯 눈이 녹지 않았다. 선은 분명히 인수봉 안으로 나 있었다. 정도전 등 개국공신들은 그것을 빌미로 인수봉 안으로 성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것이 통과되었던 것이다. 무학은 너무나 서럽고 울적하여 홀로 앉아 엉엉 울었다. 불교의 혜명이 끊긴다는 데 대한 불제자로서의 서러운 감정은 감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 후로 무학대사가 서러워 울었다하여 한양을 ‘서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한가지 설은 성을 쌓을 당시 눈이 선을 긋듯 인수봉을 둘러쌌다는 데서 눈’설’자와 울타리의’울’자를 따서 ‘설울’이라 부르다 나중에 ‘서울’로 변형되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무학은 자신이 도읍지를 정한 데 대한 뿌듯한 자부심 못지않게 불교의 명맥을 단절시키게 했다는 자책감으로 너무나 서럽고 서러워 오랜 세월을 울먹이며 지냈다고 하는데는 이의가 없다.
그리고 노인이 무학대사에게 10리를 더 가라고 가르쳐 준곳을 왕십리라 부리게 되었다. 한편 일선에는 그 노인이 풍수지리에 능했다고 하는 도선국사의 후신이라고 하여 왕십리 일부 지역이 도선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