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폐허만 남아 있는 절, 문종(1046–83)때 지은 남원의 기린산 만복사 동편에 방 한 칸을 얻어 외롭게 살아가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양생이었다. 양생은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나서 외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가끔씩 시를 짓곤 했다.
봄이었다. 배꽃이 피는 싱그러운 봄날이었다. 그의 방 앞에는 배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꽃이 피어 온 뜰을 은백의 세계로 만들었다. 이 날도 양생은 고독한 마음을 달래면서 배나무 아래를 거닐었다. 저절로 한 수의 시가 떠올라 조용히 읊조렸다.
'한 그루 배꽃나무 외로움 벗삼으니 시름도 하그리 많은 달 밝은 이 밤 외로운 창가에 홀로 누웠으니 어디메서 고운 님 퉁소를 부는가. 비취는 외롭게 짝 잃고 날아가고 원앙 한 마리 맑은 물에 노니는데 뉘 집에 마음 붙여 바둑놀이 하나. 등불 가물가물 이내 신세 점치는 듯.'
이렇게 시를 읊고 나니 문득 공중에서 소리가 났다.
“그대가 정말 고운 짝을 구하는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지 않는가?”
양생은 하늘을 쳐다보았으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아했다. 양생은 부처님을 잊고 있었음을 깨닫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은 부처님을 찾아 뵈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은 음력으로 삼월 스무나흩날이었다. 매년 이 날은 고을 사람들이 만복사에 올라와 저마다 향불을 피우고 소원을 비는 풍습이 있었다. 참으로 좋은 날이었다. 양생은 이른 아침부터 가슴이 설레었다.
‘오늘은 꼭 소원을 빌어야지. 부처님이 무심하지 않으시다면 반드시 내 소원을 이루어 주실 거야.’
저녁 예불이 끝나고 양생은 혼자 법당에 남았다. 그는 소매 속에 깊이 감추었던 저포를 꺼내 들었다. 저포란 당시 중국 사람들이 점을 칠 때 쓰는 점대 같은 것이었다. 양생이 말했다.
“존경하옵는 부처님. 오늘은 제가 부처님을 모시고 저포놀이를 하고자 합니다. 만약 제가 진다면 대중을 모아 설법하는 자리, 즉 법연을 베풀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부처님께서 지신다면 저의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제 소원은 간단합니다. 저에게 아름다운 여인 하나를 짝으로 주시면 됩니다. 부처님은 온갖 지혜를 갖추시고 능하지 못한 바가 없으십니다. 하물며 이 세상의 절반이 여자이온데 그중에서 저의 배필을 점지해 주시는 일이야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 아니겠습니까.”
부처님이 물론 말씀을 하실 리 없었다. 등상불이기 때문에. 그러나 부처님은 가피력을 베풀어 충분히 들어 주는 분이라는 것을 양생은 믿고 있었다. 양생은 혼자 빙긋 웃으며 저포를 던졌다. 저포는 말할 것도 없이 양생의 승리로 돌아갔다. 양생은 부처님께 말했다.
“보십시오, 부처님. 제가 분명히 이겼습니다. 저의 아름다운 인연은 이미 정해졌사오니 자비하신 부처님께서는 저의 소원을 저버리지 마옵소서.”
그때, 양생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무슨 일이 금방이라도 벌어질 것 같았다. 그는 부처님 탁자 밑으로 숨어 들어 동정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있으려니 꽃처럼 아름다운 묘령의 아가씨가 들어왔다. 검은 머리에 깨끗이 단장하고 곱게 차려 입은 옷매무새가 진정 고왔다. 새까만 눈동자에 그 눈이 서글서글하게 생겼으며 늘씬한 키에 긴 목을 가졌다. 월궁의 선녀, 바로 그와 같았다. 가만히 바라보니 아름답고 고운 모습은 형용키 어려웠다. 그녀는 그 고운 손으로 기름을 따르고 등잔에 불을 켰다. 향로에 향불을 지핀 뒤 물러서서 세 번 절을 올렸다. 그러고 나서 탄식하듯이 말했다.
“인생이 박명하기 어찌 이와 같사오니까.”
그녀는 품속에서 축원문을 꺼내어 부처님 탁자 위에 놓고 낭낭한 음성으로 읽어 내려갔다.
“아무 고을 아무 동네에 사는 소녀 아무개는 외람됨을 무릅쓰고 삼가 부처님전에 사뢰옵니다. 요즈음 변방이 허물어져 왜적들이 쳐들어와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따라서 봉화가 해마다 꺼질 날이 없습니다. 건물을 파괴하고 백성을 노략하오매, 친척과 노복들이 동서남북 사방으로 피난하여 정처 없이 유리 걸식하고 있사옵니다.
수양버들마냥 가냘픈 소녀의 몸이라 먼길의 피난이 여의치 않사와 갚은 안방에 조용히 틀어박혀 금석같은 굳은 정절을 더럽힘이 없습니다만, 야속하온 우리 부모님은 이 여식의 수절이 마땅치 않다고 하옵니다. 그리하여 궁벽진 곳에 숨겨 두어 초야에 묻혀 살게 된 지 거의 3년 세월이 속절없이 흘렀나이다.
밝은 달 아름다운 가을과 꽃 피는 봄날 아침에 고단한 영혼입니다. 어이 위무할 수 있사오리까. 흐르는 흰구름의 박명함을 탄식하오며 홀로 빈 방을 지키어 기막힌 밤을 보내오니, 님 그리운 이내 정이 채란의 외로운 춤을 오히려 슬프게 여겼나이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서러운 영혼 깃들 곳 없사옵고 그럭저럭 날이 가고 밤이 와서 구곡간장은 다 녹아 없어지옵니다. 어지신 부처님, 자비와 연민을 베푸시옵소서. 인간의 한평생이 이미 정해져 있사옵고 부부의 백년가약 또한 피할 길 없다 하오면, 바라옵건대 하루 속히 꽃다운 인연과 배필을 점지하여 주옵소서.”
은쟁반에 옥 굴러가듯 낭낭한 여인의 음성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축원문 낭독을 마친 여인이 가녀린 어깨를 들먹이며 어찌나 슬피 우는지 탁자 밑에 숨어서 보는 양생은 정신을 가늠할 수 없었다. 양생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스스로 그 정을 이기지 못해 탁자 밑에서 펄쩍 뛰어나왔다. 탁자 위에 다시 가지런히 놓은 글을 옆눈으로 보며 여인에게 물었다.
“낭자는 누구이기에 이 만복사 부처님에게 와서 그토록 진한 감동의 축원문을 봉독하십니까?”
양생의 물음에 여인은 다소곳하게 숙였던 고개를 들어 양생을 바라본 뒤 고개를 약간 옆으로 틀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 놀라움이나 수줍음은 없었다.
“소녀도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의심이 있으시다면 던져 두셔도 좋습니다.”
양생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뭐 자길 귀신이라고 생각했다는 건가. 아니야,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이야.’
여인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당신은 배필을 구하고 있는 중이지요. 당신 이름은 무엇입니까?”
양생이 대답하려는 찰나 그녀의 말이 앞서서 이어졌다.
“하기야 구태여 이름 석 자는 알아 무엇하겠습니까? 서로 마음이 맞고 끌리면 그만이지요.”
양생은 겨우 한마디를 했을 뿐이다.
“그그그, 그렇고 말고요.”
만복사는 오래 된 절이었다. 당우가 퇴락하여 스님네는 절한 모퉁이에 움막을 얽어 살았는데 법당 앞에는 쓸쓸한 요사채가 하나 남아 있었다. 이 요사채는 객스님이나 오면 묵고 가는 곳이었고 스님네가 모여 살아가는 얘기들을 나누는 판도방이었다.
일명 지댓방이라고도 했다. 양생은 여인에게 그곳을 가리키면서 한 손으로 여인의 손을 잡아끌었다. 여인은 거절하지 않았다. 둘은 행여 남이 볼세라 조심스레 판도방으로 들어가서 사랑을 나누었다.
-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