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조 정승 일행은 명나라에 도착하여 명제인 주원장을 알현했다. 그리고 태조 이성계가 올린 친서를 전달하였다. 다 읽고 난 명제가 호통을 쳤다.
"무엇이라고? 국호를 제정해 달라고? 군주를 섬기는 신하로서 그 군주를 치고 자리를 차지한 대역무도한 자가 이제 와서 국호를 제멋대로 정해 놓고 하나를 선택해 달라고? 당장 저자의 목을 베어라"
조 정승 일행은 단 한마디의 변명할 기회도 없었다. 하늘이 노래졌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이토록 쉽게 죽음을 맞이할 줄은 몰랐다.
일행은 형장으로 끌려갔다. 사방으로 탁 트인 넓은 광장의 한가운데 의자가 여러 개 놓여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층계로 이루어진 단이 있었는데 그곳은 집행관이 앉는 자리였다. 일행은 한가운데 놓여진 의자에 손을 뒤로 묶인 채 앉혀졌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검은 천으로 눈을 가렸으나 조 정승은 가리지 않았다. 50평생을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하늘은 맑게 개었으나 정승에게는 회색으로만 보였다. 오뉴월의 더위가 더욱 숨막히게 느껴졌다.
"아! 이젠 가는구나, 시운을 잘못 타서 이렇게 어이 없이 가는구나. 허나 한편 생각하면 그래도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정승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그다지 부러울 것도 없지 않으랴. 그래. 벼슬로서야 최고의 위치까지 올라보았으니… 그런데 왜 이리 마음이 허전할까?"
조 정승은 자기보다도 일행으로 따라온 다른 사신들이 측은했다. 그들도 줄을 잘못 섰다가 죽음을 당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부처님, 저와 같이 온 다른 사신 일행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시고 가피를 내리옵소서. 이 몸 하나 없어지는 것은 괜찮사오나 저로 인하여 뜻하지 않게 죽음을 당하는 저의 일행들은 너무나도 가엾습니다. 부처님, 자비가 있으시다 하오면 저보다는 저들을 위해 나누어 주소서."
그때 집행관이 조정승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가 거만스레 물었다.
"마지막으로 할말이 있는가?"
조정승이 대답했다.
"있소. 물한사발과 자리 한 닢만 준비해 주시오."
"여봐라. 이 자에게 물 한 사발과 자리 한 닢을 갖다 주어라."
이윽고 자리가 깔렸고 소반에 맑은 물 한 그릇이놓여졌다. 조정승이 말했다.
"잠시 이 결박을 풀어 주소.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릴 곳이 있소."
"결박을 풀어라."
조정승은 가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다음과 같이 유언했다.
"태조 성군이시여! 신 조공은 멀리 명나라에서 죽음을 만나이다. 국가 대사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불충을 용서하옵소서. 성군이시여, 만수무강하시옵고 조국의 대업이 만대에 이어지길 바라나이다. 어머님, 아버님! 부모님의 은혜는 태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사온데 늙으신 부모님보다 앞서 가는 자식의 불효를 용서하옵소서. 더욱이 막중한 임무를 띠고 와서도 그를 완수하지 못했사오니 우선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누가 됨을 어찌하겠나이까?
다시 아뢰나이다. 저와 함께 이곳 명나라에 사신으로 온 일행들 가족에게도 면목이 없습니다. 이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기야 여기서 지금 잘잘못을 따질 처지도 아닙니다. 저 사람들, 참으로 착하고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저들에게 한없이 미안함을 느낍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시여, 저는 이번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가는 길에 완공된 대가람에서 부처님을 뵙고자 하였습니다만 이제 이렇게 가오니, 이것이 만약 전생에 지은 업연이라면 달게 받겠나이다."
조 정승은 말을 마치고 동쪽을 향해 네 번 큰 절을 올렸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를 흘러내렸다. 집행관이 물었다.
"더 할 말은?"
"이젠 없소"
"다시 묶어라"
조 정승은 다시 의자에 묶인 채 앉혀졌다. 집행관이 소리쳤다.
"집행하라"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쪽에 서있던 두 사람의 망나니가 입으로 물을 머금어 칼탈에 뿌리더니 한가운데로 뛰어나왔다. 망나니들은 칼춤을 추었다. 햇살을 받아 칼날에서 푸른 서기가 번뜩였다. 망나니들의 칼춤을 보며 오히려 조 정승은 마음이 덤덤해졌다. 옆으로 돌아보니 일행들의 표정은 이미 살아있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비록 눈은 가렸지만 피부색과 움츠린 상태로 보아 이미 그들은 죽어 있었다.
조정승은 문득 ´관음경´의 내용이 생각났다. 설사 죽음을 당해서라도 관세음보살을 지성을 염하면 환난을 벗어나고 도적의 난을 벗어나며 자연의 재해까지도 입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조 정승은 염불을 외우기 시작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조 정승은 염불삼매에 들어갔다. 집행관의 신호에 따라 망나니의 칼이 조 정승의 목을 향해 날았다. 시간은 미시였다.
-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