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감,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이 비록 어리고 미숙하오나 정승대감님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초조한 마음으로 어떻게 국가대사를 치를 수가 있겠습니까? 마음을 굳게 잡수시고 신표를 정하십시오."
이성계의 조선 개국과 함께 공신으로서 정승의 자리에 오른 조공은 사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자네들은 누구며, 신표라니 무슨 신표란 말인가?"
세명의 사미는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이 주막집 뒤로 한 5리쯤 올라가면 옛날 아도화화상이 창건했다는 큰 절터가 하나 있지요. 그곳에 한 길이 넘는 세 분의 돌부처가 있습니다. 이 부처님들은 절이 폐허가 된 이후로 온갖 눈비와 바람과 서리를 맞으며 앉아 계십니다."
"그래서?"
"그 부처님들을 위해 절을 하나 장엄하게 지어드리십시오. 만약 그렇게만 하신다면 그 공덕으로 정승대감님은 국가 대사를 원만히 치르시고 귀국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한시가 바쁜 몸인데 어느 하가에 절을 지어 부처님을 모신단 말이냐?"
"아랫사람을 시키십시오."
"아랫사람?"
"그렇습니다. 대감님은 비록 어명을 받고 길을 가시기는 하지만 이 나라 정승이십니다. 황해 감사에게 명만 내리시면 곧바로 이루어질 일이 아니겠습니까?"
"허! 듣고 보니 자네들 말에도 일리가 있군 그래. 그런데 만약 명나라에 가서 죽게되면 아무리 절을 지어 부처님을 모신들 무슨 공덕이 돌아오겠는가?"
"대감님께서는 어찌 그리 마음 좁게 가지십니까? 대감님께서는 ´관음경´을 즐겨 읽으시지요? 거기에 보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관세음보살님을 지성으로 염하면 어떠한 환난으로부터도 다 벗어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오니 대감님께서 절만 지으시면 살아 돌아오시는 것은 저희가 보장을 하겠습니다. 아! 물론 큰일도 무난히 마무리 지으실테고요."
사미승들은 거듭 강조했다.
"꼭 그렇게 하시면 아무일 없이 무난하게 일을 마치시고 공덕도 쌓게 되실 것입니다. 부디 명심하옵소서. 대감님"
말을 마치자 세 사미는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좌선에 들어 있던 조 정승은 선정에서 깨어나 주막집 여인을 불렀다.
"여봐라. 여기 뒷산 골짜기로 5리쯤 들어가면 옛날 큰 절터가 있느냐?"
주막집 사내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예, 예. 있습죠. 거기에는 지금 세 분의 돌부처가 풍상을 겪고 있습니다. 몸의 절반은 흙 속에 파묻힌 채로요"
"알았다. 물러가거라. 내 지금 당장 올라가서 뵈오리라."
조정승 일행은 이른 새벽 이슬을 헤치고 산길을 걸어 올라갔다. 상큼한 새벽 공기가 쏴아 얼굴을 때렸다. 기분좋은 새벽이었다. 수천만 년을 그렇게 살아왔을 숲과 바위들에게 문득 자연의 나이를 느낄 수 있었다.한참을 오르고 있는데, 문득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이 기왓장을 보십시오. 아마 이 근처가 절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 흩어져서 찾아 보도록 하라"
사람들은 모두 흩어져 절터를 찾았다. 이윽고 한 곳에 다 쓰러져가는 건물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지붕은 움푹 꺼졌고 그 깨진 자리에 쑥대가 하늘을 높은줄 모르고 자라 있었다. 마당이고 요사채고 담장이고 온통 잡초로 무성했다.금방이라도 구렁이 몇 마리쯤 나올 것 같은 폐허였다. 이제 날은 훤히 밝아서 주위가 완연히 눈에 들어왔다.
조정승은 쓰러져가는 건물들을 바라보며 언젠가 부처님의 경전 속에서 읽었던 구절을 생각했다.
모든 외형적인 것들은 덧없고
내면의 세계도 찾아보면
다만 공일 뿐 본질은 없다.
생겼다 스러지고
다시 생겨나는 그러한
반복들에 대해서
마음을 초월하여
집착하지 않으면
그것이야말로 참된 즐거움
여래는 이것을 열반이라 하노라.
조정승은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불교 경전을 잠시도 손에서 놓은 일이 없었다.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무상´이라는 숙어를 이날만큼 절실히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래, 주역(周易)이라는 유교 경전도 따지고 보면 변화 작용의 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역(易)이란 변화의 원리다. 그 변화의 원리를 주나라 때 이미 생각하고 정리했다하여 주역(周易)이라 하는 것이리라. 그렇다고 한다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상(無常)이란 말도 바로 변화의 원리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아! 이처럼 모든 가르침의 궁극적인 것은 하나로 만나는 것인가."
조 정승이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데 사신 중의 한 사람이 다가와 다소곳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대감마님! 저기 세 분의 돌부처가 있습니다 가보시지요."
정신이 퍼뜩 든 정승 조공은 그가 안내하는 쪽으로 몇 걸음 발길을 옮겼다. 과연 거기에 흑갈색의 돌부처가 머리에 잡초와 먼지와 흙을 인 채 앉아 있었다. 이미 허리 아래로는 퇴적물들이 쌓여 입상인지 좌상인지 분간키 어려웠다. 그러나 손의 위치로 보아 좌불상이 분명했다.
조 정승은 머리를 숙였다. 무릎을 꿇고 불상 앞에서 합장을 하고 기도했다.
"부처님, 풍상에 마멸되어 가시는 부처님을 뵈오니, 문득 제신세가 가여워지는 것은 어쩐 일이옵니까? 저는 지금 태조의 명을 받고 명나라로 가는 길입니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길입니다. 부처님께서 자비가 있으시다면 저를 위해 가피를 내려 주시옵소서. 제 비록 미약하오나 한 나라의 정승으로서 부처님을 위해 대가람을 지어드리도록 조처하겠습니다. 만일 제가 다시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면 그때 부처님을 아름다운 대웅전 안에서 뵐 수 있을 것입니다."
-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