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순응과 이정 두 고승은 중국에 건너가 유학을 하고 돌아와서는 대가람 터를 찾고 있었다. 그것은 중국의 지공화상탑묘에서 있었던 기연 때문이었다.
신림의 제자 순응화상은 그보다 나이가 한참 아래인 이정과 함께 신라 혜공왕 2년(서력 766) 중국으로 구도의 길을 떠나 여러 곳을 다니며 수학했다. 특히 화엄학에 관심이 있어 화엄학을 전공한 순응과 이정은 몇 년 뒤에 신라로 돌아왔다.
그들은 신라로 돌아오기 전 지공화상의 탑묘를 참배하게 되었다. 지공화상은 본디 양무제(서력 502~549 재위)때 활약했던 고승이었는데 ´동국답산기´라는 저술을 남겼다. 이 책은 일종의 기행문으로 중국과 고구려, 백제, 신라의 명산을 두루 답파하면서 보고 느낀 점들을 기록한 것이었다.
지공화상은 입적할 때 유언을 남겼다.
"내가 입적한 뒤 신라에서 두 사람의 승려가 찾아올 것이다. 그들에게 나의 책 ´동국답산기´를 전하거라."
그 유언은 2백여 년이 넘도록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이어져 왔고 마침내 순응과 이정이 탑묘를 찾아가자 지공의 몇 대 후손들이 ´동국답산기´를 전해주면서 유언까지 전했다. 두 스님은 유언을 생각하며 지공화상의 현신을 기도했다. 불보살이 중생의 기도에 감응하여 헌신하듯 지공화상 또한 헌신 하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기도는 일 주일간 계속되었다. 순응화상과 이정화상은 교대로 목탁을 잡았다. 이윽고 일 주일의 기도가 끝날 무렵 탑으로부터 지공화상이 나타났다. 그는 오색구름을 타고 있었다.
"그대들의 구도심은 참으로 놀랍구나. 내 이제 그대들에게 옷과 발우를 주어 법이 신라로 전해짐을 증표하겠다. 불법이란 능한 자가 가져 가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 신라 땅 우두산 서쪽에서 불법이 크게 흥하리니 그곳에 가서 대가람을 세우라."
지공화상은 말을 마치고 오색구름과 함께 탑 속으로 사라졌다.
구법의 행각, 즉 유학길에서 돌아온 순응화상과 이정화상은 신라로 돌아와 곧바로 우두산을 찾았다. 그들은 우두산의 산세가 빼어나고 맑은 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임시로 터를 잡아 정진을 계속했다.그들은 삼매에 들어 이을 때는 항상 정수리로부터 신령스러운 광명이 하늘을 향해 치솟곤 하였는데 애장왕의 신하들이 찾아갔을 때도 광명은 솟아올랐다.
이러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애장왕은 국가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마침내 해인사라는 대가람이 창건되었다. 애장왕 3년(서력 802)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순응과 이정이 유학길에서 돌아온 지 20여 년이 훨씬 지나서였다. 애장왕이 태자 헌덕왕에게 자리를 물려줄 즈음 왕후는 성목 태후가 되었고 순응도 입적하였다. 순응의 뒤를 이어서 이정이 계속해서 불사를 했다.
그때 성목 태후는 전답 2천 5백 결을 하사하였으며 이정이 해인사불사를 완성하도록 온 힘을 기울여 도와주었다. 거기에는 물론 헌덕왕의 불심도 크게 작용하였다.
-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