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만에 다시 보는 옛 길이 정겹게 느껴졌다. 몰골옹 노인이 있는 곳에 이르니 노인은 아직도 그대로였다. 더 늙어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회춘이 되지도 않았다. 몰골옹은 신을 삼고 있었다.
"몰골옹 어른,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소승 회정이라고 합니다. 한 3년 전쯤 어른께 하룻밤 신세를 졌던 사람입니다. 저를 알아보실 수 있으십니까?"
몰골옹이 대답했다.
"알아보다마다, 기억이 생생한 걸."
"그러십니까?"
"그래 해명방 어른은 뵈었으며, 보덕 각시는 만났는가. 아! 그리고 관음진신은 친견하였는가?"
회정은 3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대충 얘기했다. 한참 회정의 말을 듣던 몰골옹이 혀를 차며 아쉬워했다.
"자네는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네."
"그게 무슨 말슴이십니까?"
"그 해명방 어른이 곧 문수보살이요. 보덕 각시가 관음진신인데…"
"그렇습니까?"
"그래, 자네는 3년 동안이나 보덕 각시와 자리를 함께 하면서도 그녀가 관음진신인 줄 몰랐단 말인가. 그리고 그 해명방 어른이 문수보살의 화현이란 걸 모르고 지냈단 말인가? 그러니 내가 자네를 어리석다고 할 수밖에… 쯧쯧."
회정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럼 노인장은 누구십니까?"
"나는 보현보살의 화신이지. 문수와 관음에게 길을 인도한 보현보살이야."
회정은 보현보살이라는 말에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만 그는 관음진신인 보덕 각시와 문수보살의 진신인 해명방의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회정은 몰골옹에게 삼 배를 드리고 즉시 돌아섰다. 보덕과 해명방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몇 걸음 가다가 몰골옹이 ´나는 보현보살의 화신이지´라고 한 말이 생각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있었던 몰골옹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었고 초막도 보이지 않았다. 회정은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참으로 나는 박복한 중생이구나. 보현보살이라고 한 말을 듣고도 미처 깨닫지 못했으니, 아! 어리석은 중생이여! 회정이여!´
회정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러다가는 관음진신인 보덕 각시와 문수보살이라던 해명방도 놓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달음에 해명방과 보덕 각시가 머물던 초막에 이르렀다. 그러나 거기에는 초막도 없고, 해명방과 보덕 각시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보덕 각시 곁을 떠난 지 불과 한 점(2시간)밖에 안 된 그런 짧은 순간이었다.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더니 회정은 결국 두 마리 토끼를 쫓는 꼴이 되었고 결국 한 마리의 토끼도 잡지 못하는 격이 되었다. 둘러보니 보덕 각시가 빨래하던 바위와 냇물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모탕에는 어제까지만 해도 패던 장작이 남아 있었다. 푸른 하늘도 허허로히 회정을 비웃고 있었다.
"보덕 각시, 보덕 각시이! 해명방 어른, 해명방 어르은!"
회정의 부르는 소리는 먼산까지 갔다가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메아리는 이처럼 되돌아오는데 그 두 부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문수와 관음은 나타나지 않았다. 바람이 스산하게 불고 있었고 그 사이 사이로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언뜻 언뜻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었다.
회정은 문득 외로움을 느꼈다. 천지간에 홀로 떨어진 그런 외로움이었다. 사람이 정을 붙이고 살다가 헤어진다는 것이 바로 이런 외로움이구나 싶었다. 회정은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아! 나는 죄업의 업장이 얼마나 두터우면 3년씩이나 관음진신을 데불고 문수보살과 함께 살았으면서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단 말인가. 그리고 보현보살의 진신마저 놓쳐 버리고 말았으니, 이 어리석은 중생을 어이 제도할꼬?´
회정은 송라암으로 돌아왔다. 그는 도량을 말끔히 청소하고 다시 백일관음기도에 들어갔다. 어차피 내딛은 발걸음이니 끝장을 봐야 할 것이었다.
문수와 보현과 관음을 친견하고도 그들이 문수와 보현과 관음의 진신임을 깨닫지 못한 무지를 참회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재도전하여 관음진신을 친견키 위함이었다. 보현과 문수도 만나야 했다. 재도전하는 백일기도는 철저하였다.
처음 송라암을 떠나기 전에는 천일기도를 봉행했지만 때로 피곤하면 잠자리에 들기도 했는데 이번의 백일기도는 정말이지 피나는 수행이었다.
이윽고 백일기도 회향이 점차 다가왔다. 백일이 되는 새벽에도 그의 기도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긴장이 풀렸는지 쏟아지는 잠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그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또다시 지난번에 만났던 귀부인을 만났다.
"이보시오, 회정스님. 어찌하여 그러한 실수를 저지르셨소? 스님은 관음진신인 보덕 각시를 데리고 3년간이나 지냈으면서도 그녀가 관세음보살임을 알아보지 못했소. 문수보살과도 3년 동안이나 함께 나무하고 장작을 패고 저자에를 다니고 했으면서도 해명방이 바로 문수보살의 진신임을 몰랐소. 게다가 내가 처음 일러준 몰골옹이 보현보살의 진신임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오. 내 이제 그대의 정성을 갸륵하게 여겨 다시 일러 주겠소. 오늘 낮 기도회양을 하는 즉시 만폭동으로 가시오. 거기서 보덕 각시, 즉 관음보살을 만날 수 있을 것이오."
회정은 귀부인의 말을 듣고 물었다.
"감사합니다. 하온데 당신…?"
회정이 고개를 들어 귀부인의 얼굴을 보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그 자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꿈을 깨고난 회정은 생각보다 선명한 꿈속의 사실을 마음 속에 깊이 새기고 회향기도를 앞당겨 봉행했다.
한낮이 조금 지나 만폭정에 이르렀다. 한 폭의 그림 같은 경치에 잠시 도취되어 있는데, 폭포 위 바위 위에 한 여인이 머리를 감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하얀 옷을 걸치고 있었다. 회정은 걸음을 빨리하여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분명 보덕 각시였다.
"보덕 각시! 소승 회정이올시다."
여인이 회정의 음성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우유빛 고운 피부가 회정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회정은 저도 모르게 보덕 각시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손목을 덥썩 잡았다.
그러나 그것은 허공이었다. 잡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신기루였다. 그것은 구름이었고 바람이었다.그녀의 모습은 찰나 사이에 사라져 버렸고 대신 그 자리에서 난데없는 오색찬란한 새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올랐다.
새는 천친히 아주 천천히 날았다. 회정은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는 새가 날아가는 방향을 향해 뛰기 시작하였다.
한참을 쫓아갔다. 문득 새를 놓쳐 버렸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회정은 또 하나의 폭포 위에 허공 속으로 깊숙이 파고든 커다란 나무를 발견했다.거기에 하얀 옷을 입은 보덕 각시가 서 있었다. 그녀는 멀리서도 알 수 있을 만큼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 놓고 활짝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폭포수 아래서 물결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회정은 절벽 위를 타고 올랐다. 그녀 가까이 갔을때 그녀의 뒤로 자연동굴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보덕 각시가 굴 속으로 안내하였다. 굴은 내부가 제법 넓었으며 거기에는 경상과 경책, 불기, 촛대, 향로 등이 놓여 있었다 회정이 물었다.
"이 굴은 언제부터 있었으며 여기에 있는 이 기물들은 누구의 것입니까?"
보덕 각시가 말했다.
"바로 전생에 스님께서 쓰시던 유물입니다. 스님은 전생에는 보덕화상이라 일컬은 고승이었지요. 이제 여기서 수도정진을 하십시오. 반드시 깨달음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온 데 간 데 없이 없어졌다. 그 순간 회정은 크게 깨닫음을 얻었다. 보덕 각시만이 관음진신이 아니라 회정 자신도, 그리고 한 떨기 풀잎도 한 그루의 나무도 모두가 관음진신이었다.
보이는 모습은 모두가 관음의 자비로운 성상이었고 흐르는 물소리와 새소리, 풀벌레소리 바람소리가 모두 관세음이 내는 묘음이었고 해조음이었다. 그는 깨달음의 환희에 깡총깡총 뛰고 싶었다. 회정대사는 바위 위에 커다란 글씨로 다음과 같이 새겼다.
「진신으로서의 관자재보살 보덕 각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여기 머물다」
회정은 그 후 강화에 보문사를 창건하는 등 관음도량을 개설하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보덕화상의 생물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대강 영양왕(서력 590~617 재위) 대에서 영류왕(서력 618~641 재위)을 거쳐 보장왕을 끝으로 멸망하기 전 완산주 고달산으로 자리를 옮겨 여생을 보낸 것으로 추정한다.
보덕화상이 백제의 땅인 완산주로 옮긴 때는 서력 650년으로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 9년이었고 백제 의자왕 10년이었다. 보덕화상은 젊은 시절을 금강산의 보덕굴에서 보냈다.
그는 거기서 관음신앙을 바탕으로 정진하다가 관음의 진신인 보덕 각시를 친견하게 되었다. 보덕화상은 보덕 각시를 한 번 본 뒤에 스스로의 호를 보덕이라 고치고 자신이 정진하던 천연동굴도 보덕굴이라 불렀다.
보덕굴에서 깨달음을 얻은 보덕화상은 금강산을 떠나 평양의 반룡산 연복사로 자리를 옮겨 후학제접과 중생교화에 힘을 쓰니 그의 법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렸다.
-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