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나이는 흰 머리가 절반쯤 있는 것으로 보아 예순 이쪽저쪽이었다.
"나오너라, 이놈. 당장 혼쭐을 내주겠다. 이 망할 자식아."
노인은 헛간에 있는 지게 작대기를 움켜 쥐었다. 비록 나이는 들어 보이지만 그의 체력은 젊은 사람 대여섯은 당하고 남을 만큼 왕성해 보였고 체격도 일곱 자는 되어 보였다. 회정이 마당으로 나서며 변명을 하려는 찰나였다. 노인이 잡고 있던 작대기로 회정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회정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며 마당에 뒹굴었다. 그런데도 노인의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머리고 옆구리고 다리고 가릴 것 없이 작대기로 보리타작하듯 패대는 것이었다. 회정은 정신을 잃었다.
잠시 후 물벼락을 맞고서야 정신을 차린 회정은 어떠한 경우라도 인내하고 복종해야 한다던 보덕 낭자의 말을 생각했다.
"이놈! 썩 나가거라."
회정은 무조건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노인의 언성이 높아졌다.
"뭣이 어쩌고 어째?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그래 이놈! 무엇을 잘못하기는 했나 보구나. 잘못이 없는 놈이라면 잘못했다는 말도 용서해 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을 텐데. 이노옴!"
보덕 각시가 옆에서 보다가 말렸다.
"아버지, 이 스님은 잘못이 없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제게 있어요. 제가 들어오라고 했거든요. 아, 아버지를 찾아왔다고 하는데 어떻게 문밖에서 기다리도록 할 수 있어야지요. 날씨도 제법 쌀쌀해지고 해서…"
노인은 보덕 각시의 얘기를 듣고 나서 성미가 약간 수그러드는 것 같았다.
"너는 어느 절에 사는 작잔데 나를 찾아왔느냐? 용건이 무엇이냐?"
보덕 각시가 계속 거들었다.
"예, 아버지. 이 스님은 금강산 장안사 아래 송라암에서 천일관음기도를 봉행한 뒤 꿈에 어떤 귀부인을 만나 이곳으로 해명방 어른, 즉 아버지를 찾아가라는 말을 듣고 이렇게 왔다 합니다. 이미 몰골옹 어른을 뵙고 오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천일관음기도를 하고 관음진신을 친견하겠다? 옛다 이놈! 관음진신 친견하기가 그리 쉬울 것 같으면 세상에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만일기도라면 또 모르지만… 여러 말 필요 없다. 송라암이든 어디든 가서 만일기도를 하고 오든지 말든지 해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해명방은 다시 몽둥이를 집어들었다. 하지만 회정도 작정한 바를 관철시키기 위한 고집이 있었다. 발길로 차고 주먹과 몽둥이로 때리고 온갖 행동을 다했지만 회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노인이 힘이 빠졌는지 조금 수그러졌다. 회정이 해명방 앞으로 조금 다가서며 말했다.
"소승 업장이 두터운 사람입니다. 해명방 어른께서 저의 두터운 업장의 구름을 걷어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해명방이 껄껄 웃으며 시로써 노래하였다.
만일 누가 부처님의 경지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 마음을 허공처럼 비우라.
망상과 온갖 갈등을 멀리 여의고
그 마음 언제나 걸림이 없게 하라.
해명방의 노래를 들으며 회정은 환희에 젖어 들었다. 그때였다.
"여보게 회정, 자네가 만일 관음진신을 친견코자 한다면 한 가지 조건이 있네. 그 조건만 수락한다면 관음진신을 친견하기란 어렵지 않네."
해명방의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조건이란 말에 회정은 귀가 번쩍 띄었다.
´도대체 저 어른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언제는 길길이 뛰고 야단이더니 어떻게 저렇게 차분하고 부드러운 모습으로 바뀔 수 있지?´
"무슨 조건이신지요? 관음진신을 친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떠한 조건이라도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내 딸 보덕과 혼인을 해야 되네. 우리 보덕과 말일세."
"하지만 소승은 출가한 몸, 어찌 계를 파하고 혼인할 수 있갰습니까?"
"그렇다면 할 수 없구나. 이노옴! 당장 이 자리에서 꺼지지 못하겠느냐?"
그때 보덕 각시가 해명방 옆에 있다가 회정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무슨 말이든 다 수용하라는 뜻이었다.
"좋습니다. 해명방 어른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너는 이런 말도 들어보지 못했느냐?"
그러면서 해명방은 시로 노래하였다.
불법이 세간에 있나니,
세간 떠나 깨달음 없네.
세간과 출세간이란
다만 이 마음에 있을 뿐
해명방은 회정에게 마당을 쓸게 했다. 그리고 거적을 거기에 깔았다. 보덕 각시는 동이에 물을 길어왔다. 두 사람은 물동이를 가운데 두고 양편으로 갈라섰다. 해명방이 집사를 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러는 사이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는 장인인 해명방을 따라 땔나무를 해다 팔아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나무를 팔아 먹을 양식을 사고 입고 쓸 옷과 일용품을 사오기도 했다.회정은 그러한 단조로운 삶에 서서히 귄태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틈만 나면 해명방에게 물었다.
"장인 어른, 관음진신은 언제쯤이면 친견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마다 해명방의 대답은 똑같았다.
"관음진신의 친견? 거 좋지. 헌데, 그런 성현을 친견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그리 쉬운 것은 아닐세. 적어도 10년은 나와 함께 지내야 할 거야."
그렇게 묻고 답하기 3년이 지났지만 3년 전이나 3년 뒤나 대답은 항상 10년이었다. 견디다 못한 회정이 하루는 다짜고짜 말했다.
"해명방 어른, 아니 장인 어른. 장인 어른께서는 제 물음에 언제나 같은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사람이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정말이지 더는 못 기다리겠습니다. 관음진신을 친견하게 해주시든지, 아니면 저를 놓아 주십시오. 답답해 미칠 것만 같습니다. 장인 어른, 그리고 보덕 각시가 어디 여자입니까? 딸 시집 못 보낼까봐 저를 강제로 협박하여 사위로 삼아 놓고 제 소원은 본 체 만 체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건 원, 통 재미가 있어야지."
해명방은 느닷없는 회정의 공격에도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너를 묶었더냐? 놓아 달라느니, 답답하다느니 하게. 그리고 내 딸 보덕이 어디가 어때서 그러느냐? 그렇게 불평과 불만이 많으면 너 좋은 대로 하면 될 게 아니겠느냐? 이놈아, 인생을 어찌 재미로만 사느냐? 고얀 놈 같으니라고."
"장인 어른, 그럼 저는 이만 장인 어른 곁을 떠나겠습니다. 송라암도 그립고 옛날 중 노릇하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허! 이놈, 중 노릇이 뭐 별거더냐? 하기야 별것이라면 별것일 수도 있겠지 그리고 이놈의 몰골옹인가 보현인가 하는 늙은이를 가만 두어서는 안 되겠구먼, 공연히 참한 젊은이를 가라 마라 해서 번거롭게 하다니."
회정은 그러나 해명방의 이 말을 듣지 못했다. 그는 떠나야겠다는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회정은 바랑을 챙기고 속복을 벗었다. 그리고 승복으로 갈아 입었다. 하긴 승복이 속복이었고 속복이 승복이었다. 재단이 똑같은 승복과 속복은 색깔만 다를 뿐이었다. 그는 다시 제 손으로 머리를 깎았다.
곁에서 보덕 각시가 거들어 주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눈물을 흘리거나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작별을 고한 회정은 다시 산을 넘어 몰골옹이 살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