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진신을 친견하고 싶다고 했소?"
느닷없이 물어오는 노인의 말에 회정은 정신이 퍼득 들었다. 그는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노인장. 노인장께서 어리석은 사람을 위해 좋은 가르침을 주십시오. 관음진신을 친견하고 싶습니다."
회정은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공손하게 말하는 자신을 대견스럽게 여겼다.
"관음진신을 친견하려면 나와 해명방을 찾으라고 했지요? 그 부인이 가르쳐 주긴 바로 가르쳐 주었구먼 그나저나 해명방을 만나려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오두막 맞은편 산을 넘어가야 하오. 하여간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쉬고 내일 가도록 하시구려. 아, 참! 회정스님이라고 하셨지요?"
"네, 그렇습니다. 회정입니다."
"아이구! 내 정신 좀 봐. 스님께서는 아직 저녁공양 전이시겠구려?"
회정은 노인의 물음이 너무나 반가웠다. 차마 꺼내지 못하고 있던 말을 노인이 물어 주니 다행이다 싶었다.
"부끄러운 말씀이오나 아직 아무 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송라암을 떠난 뒤로는요. 뭐 먹을 것이 좀 있을런지요."
"아이구, 손님이신데. 내가 찾아올 테니 가만히 계십시요."
노인이 부엌으로 나가고 회정이 혼자 방에 남았다. 벽이고 천장이고 온통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어둠침침한 등잔불이 방안을 더욱 칙칙하게 만들었다. 금방이라도 바퀴벌레나 거미가 기어나올 것 같았다.
잠시 있으려니 노인이 도토리묵을 깨진 바가지에 담아가지고 들어왔다. 손때와 세월의 이끼로 실밥이 이미 새까맣게 되어버린 그런 바가지였다. 배는 고프면서도 막상 달려들어 먹고 싶지가 않았다. 회정이 멍하니 앉아 있으니 노인이 도토리묵 바가지를 들며 말했다.
"저녁을 자신 게로군. 그럼 내일 아침에 드시도록 하시오."
"아, 아닙니다. 몰골옹 어른. 아주 맛있어 뵈는데요. 지금 먹겠습니다."
도토리묵을 입에 넣어 보니 바가지보다 도토리묵 맛이었다. 참으로 향굿한 음식이었다. 회정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도토리묵 한 바가지를 뚝딱 먹어치웠다. 회정이 먹는 모습을 바라보던 노인도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자, 그럼. 이제 그만 주무시지요."
회정은 잠자리에 누웠다. 지친 몸이어서 금방 곯아떨어졌다.
다음날 날이 밝았다. 몰골옹은 벌써 일어났는지, 밖에서 군불을 지피고 도토리묵을 만들고 있었다.
"어디 한 번 몸이나 풀어 볼까."
회정은 저고리를 벗고는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삼십대 초반의 건장함을 노인 앞에서 뽐내보고도 싶었다. 그가 송라암에서 해온 솜씨대로 도끼날이 모탕에 떨어지는 순간 이미 장작은 두 조각으로 튕겨져 나갔다.
"어휴, 젊은 스님이 장작을 패시는구려. 이제 그만 들어와 공양이나 하오."
언제 왔는지 노인이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다 놓고 식사하라고 했다. 회정은 세수를 하고 수건으로 물기를 훔친 후 상 앞에 앉았다. 식단이라곤 여전히 도토리묵에 간장을 얹은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도 땀을 흘린 탓인지 맛이 좋았다. 몰골옹이 다짐하듯 물었다.
"해명방을 찾으신다 했수?"
노인의 물음에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확인한다는 뜻이 들어 있었다.
"해명방을 찾으려거든 저기 보이는 앞산을 넘어 한 십 리쯤 가면 또 하나의 깊은 골짜기가 있을 것이오. 거기서 왼쪽으로 길을 잡아 조금만 들어가면 조그마한 초막이 있소. 거기에 해명방이 살고 있소."
회정은 아침 공양을 끝내고 노인이 가르쳐준 대로 앞산을 넘었다.
늦가을로 접어드는 금강산은 풍악산에서 개골산으로 점점 탈을 바꾸고 있었다. 한참을 걸어 들어가니 숲 사이로 초막이 한 채 아스라이 보였다.
"계십니까? 주인장 계십니까?"
초막 안에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가녀린 여인의 음성이었다.
"뉘시온지요?"
"금강산 송라암에서 온 회정이라 하는 운수올시다. 여기가 해명방 어른 댁이 맞습니까?"
그제서야 문이 열리며 묘령의 낭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회정은 그녀를 보고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에 그만 현기증을 일으켰다.
"그렇습니다만 어인 일인지요?"
회정은 여인에게 도취되어 여인의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예, 예? 방금 뭐라 하셨는지요?"
"여기가 해명방 어른 댁이 맞습니다. 한데 지금은 산에 땔나무를 구하러 가시고 안 계시는데요. 이를 어쩌지요?"
회정은 겨우 정신을 차였다.
"아! 괜찮습니다. 기다리지요, 뭐."
회정은 봉당에 앉아 앞산을 바라보았다. 여인이 뒤에서 말했다.
"방으로 들어오시지요. 봉당에 앉아 계시니 제가 괜스레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해명방 어른하고는 어떻게 되는 사이십니까? 그리고 언제쯤 돌아오실까요?"
"그 어른은 소녀의 아버지시고요, 아마 점심때쯤이면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미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저의 아버지는 성격이 급하시기로 소문난 분입니다. 천성은 한없이 착하시지만 일단 화가 나셨다 하면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저의 아버지가 뭐라고 하시더라도 절대로 대들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격이 급하다는 말에 회정은 퍼득 정신이 들었다.
"그렇게 난폭하십니까?"
"난폭이라! 그렇지요. 난폭한 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간 관음진신을 친견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어떤 경우라도 인내하고 복종하셔야 합니다. 잘 알아들으셨죠?"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낭자는 실례지만 어떻게 불러야 하겠습니까?"
"낭자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여자가 무슨 이름이 더 있겠습니까?"
"여자라고 이름이 없을 수는 없지요. 시집이라도 가고 나면 남편을 따라 이름이 없어진다고 하겠지만 아직 미혼이신 것 같은데…"
"아버지가 보덕이라 지어주셔서 남들은 보덕 각시라 부르고 있습니다."
얘기를 하는 도중 회정은 보덕 낭자가 조금 전에 한 말을 상기하면서 물었다.
"보덕 낭자께서는 방금 전에 제게 ´관음진신을 친견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란 말씀을 하셨는데, 어떻게 제 목적이 관음진신을 친견하는 데 있음을 아셨습니까? 행여 낭자께서는 남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타심통을 얻으셨습니까? 이를테면 독심술 같은 거 말입니다."
"제가 그렇게 말했던가요? 아니 나는 그냥 해본 말인데… 그나저나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스님."
회정이 보덕 낭자를 따라 방안으로 들어서니 밖에서 보던 초막하고는 전혀 달랐다. 너무나 깨끗했고 정리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 몰골옹의 집과는 정반대였다.
"역시 아름다운 여인이 계시는 집이라 다르군요. 참 깨끗하게 해놓고 사십니다. 이런 걸 보면 역시 집안 살림은 여인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말을 하고 나서 회정은 쓸데없는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낭자 앞에서 마음을 들켰다는 생각에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보덕 낭자께서는 이곳에 계신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하도 산세가 좋아서 말입니다."
"네, 제가 태어난 곳도 이곳이요, 자란 곳도 여깁니다. 아직 밖을 나가 본 적이 없어요. 저는 별로 좋은 줄 모르겠는데 그렇게 이곳이 좋으세요? 스님께서 계시던 송라암도 금강산에 있지 않습니까?"
그때였다. 밖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아마 나뭇짐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돌아오셨나 봐요."
말을 마치자 그녀가 먼저 달려나갔고 회정도 엉거주춤 일어나 방문을 나서려는데 낭자의 아버지인듯한 노인이 벽력 같은 소리를 질렀다.
"웬 놈이냐? 젊은 처녀가 혼자 있는 방에 어디서 굴러먹던 녀석이냐? 오라! 중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남의 딸을 넘보려는 중놈이 분명하렷다?"
노인은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밀어붙였다.
-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 -